칼럼 | 치매는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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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이안한의원 작성일26-05-19 12:44 조회10회본문
[정이안의 건강노트] 치매는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주간한국 2026.04.24
치매는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치매를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병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날부터 기억이 뚝 떨어지고, 사람을 못 알아보고, 길을 잃는 상태가 시작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치매는 대개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 작지만 분명한 변화들이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 신호를 대부분 “나이 들어서 그렇겠지” 하고 넘긴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흔한 오해는 건망증과 인지장애를 같은 것으로 보는 일입니다. 나이가 들면 이름이나 약속이 잠깐 생각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떠오르면 보통은 정상적인 노화 범주로 봅니다. 반대로 중요한 날짜를 자꾸 잊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메모나 가족의 도움 없이는 예전처럼 생활을 꾸리기 어려워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잊어버리느냐”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가 일상생활을 흔들고 있느냐입니다.
인지장애를 의심할 때는 기억력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초기에 더 눈에 띄는 것은 생활의 어수선함입니다. 늘 하던 일을 자꾸 헷갈리고, 익숙한 순서를 놓치고, 계산과 정리가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매달 하던 공과금 정리가 자꾸 밀리거나, 즐겨 하던 요리 순서를 놓치거나, 평소 다니던 길에서도 잠깐 방향감각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조금 덜렁대네”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본인에게는 이전과 다른 분명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깜빡거림보다 더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말과 대화의 변화도 중요한 신호입니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잠깐 멈추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대화 흐름을 놓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익숙한 물건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이야기의 앞뒤 연결이 자꾸 흐트러진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특히 본인은 “말이 잘 안 나온다”고만 느끼는데, 가족은 “말이 예전보다 빙빙 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지장애는 머릿속 기억창고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을 꺼내고 정리하는 능력의 변화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부분이 판단력의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꼼꼼하던 분이 돈 관리에서 반복적으로 실수하거나, 낯선 전화나 문자에 쉽게 속거나, 위생과 안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옷차림이 달라지고, 계절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잦게 하는 것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지기능은 단순 암기력이 아니라, 판단과 계획, 위험을 피하는 능력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먼저 알아차리는 변화도 있습니다. 예전보다 약속을 피하고, 모임을 귀찮아하고, 하던 취미를 접고, 사람 만나는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이제 귀찮아서 그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대화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고, 실수할까 불안하고, 낯선 상황을 처리하는 데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저하는 종종 기억보다 먼저 사회적 위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좀 달라졌다”는 가족의 느낌은 의외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때 꼭 알아두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기억력 문제는 치매가 아닙니다. 약물 부작용, 우울과 불안, 갑상선 질환, 비타민 B12 부족, 음주, 머리 외상, 심한 스트레스, 영양 문제 등도 기억력과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배우자를 잃은 뒤, 어떤 분은 은퇴 후 삶의 리듬이 무너진 뒤부터 멍함과 건망증이 심해집니다. 이런 경우는 원인을 바로잡으면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력 저하를 느낄수록 더더욱 “혹시 치매인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원인이 무엇인지 평가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경도인지장애라는 단계에서는 기억이나 사고력이 또래보다 떨어져 보이지만, 아직은 혼자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경도인지장애가 있는 사람은 중요한 약속을 놓치거나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일이 늘 수 있지만, 대개 기본적인 일상생활은 스스로 해냅니다. 즉, 인지기능 저하와 치매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단계에서 변화를 알아차리고 추적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5세 이상 경도인지장애 환자에서는 1년 사이 10명 중 1~2명 정도가 치매로 진행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반대로 그대로 지내거나 좋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기평가는 불안만 키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공포를 줄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치매는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 말을 더듬고, 약속을 놓치고, 물건을 자꾸 잃어버리고, 평소 하던 일을 번거로워하고, 사람 만나는 자리를 피하고, 생활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시간이 먼저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기억력은 나이와 함께 조금 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냥 늙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치매를 두려워하기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변화를 인정하고, 미루지 말고, 정확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인지장애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관찰력입니다. 그리고 그 관찰은 생각보다 작은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글쓴이
정이안원장-한의학박사, 정이안한의원 원장이며, 자율신경연구소 원장이고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외래교수이다. 저서로 안티에이징 시크릿 - 자율신경건강법, 마흔 달라진 몸을 되돌릴때, 생활 습관만 바꿨을 뿐인데, 몸에 좋은 색깔음식 50 외에도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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